나의 좌표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한국인의 부모를 두었으나 스페인 여행 중 예기치 못한 탄생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이름은 ‘안토니오’였다.
한국인의 외모를 하고 이국적인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은 나에게 늘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악의 없는 질문들조차 나에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박혔고, 이름 하나로 인해 늘 주변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이름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남들과 다르게 낙인찍는 지우고 싶은 허물이었다.
한국인의 외모를 하고 이국적인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은 나에게 늘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악의 없는 질문들조차 나에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박혔고, 이름 하나로 인해 늘 주변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이름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남들과 다르게 낙인찍는 지우고 싶은 허물이었다.
이후 나는 ‘신종욱’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며 비로소 그 고통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나 풍경 속에 안착하는 듯 보였다.
이제야 내 외모와 이름이 하나의 풍경처럼 어우러진 듯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서 낯선 틈을 발견하곤 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 그것은 내가 완벽하게 이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내면에 이방인의 감각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야 내 외모와 이름이 하나의 풍경처럼 어우러진 듯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서 낯선 틈을 발견하곤 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 그것은 내가 완벽하게 이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내면에 이방인의 감각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얼마 전 마주한 용과의 단면은 이런 나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은유였다. 흰 과육 속에 박힌 무수한 씨앗들 사이로 검은 플라스틱 포크를 꽂았을 때, 포크는 씨앗의 색과 크기를 흉내 내며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분명히 존재하는 포크였지만, 그것은 씨앗들 사이에 섞여 '용과의 일부'로 위장하며 침묵한다.
하지만 아무리 씨앗인 척 숨어 있어도 플라스틱 포크는 결코 씨앗이 될 수 없다. 열에 의해 형태를 바꿀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는 플라스틱의 '가소성'처럼, 나 또한 ‘신종욱’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나를 변형시켜 세상 속에 섞여 들었을 뿐이다.
빛의 각도가 바뀌면 플라스틱 특유의 매끄러운 광택이 번뜩이며 이질감을 드러내듯, 내 안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안토니오’였던 기억이 단단한 심지처럼 남아 있다.
빛의 각도가 바뀌면 플라스틱 특유의 매끄러운 광택이 번뜩이며 이질감을 드러내듯, 내 안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안토니오’였던 기억이 단단한 심지처럼 남아 있다.